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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중기 강원지방의 유학(儒學·性理學) 조 남 국(趙南國, 강원대학교 교수)
Ⅰ. 머 리 말
이 글에서는 조선조 중기에 해당되는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 사이를 중심으로 강원지방의 서원(書院)에 배향된 인물들의 업적이 성리학의 내면화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내용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유학의 의미를 개관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이러한 의미의 유학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한 인물이 바로 강원 지방의 서원에 배향되어 왔다는 사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서원에 배향된 인물에 의해서 그 지역주민의 인성 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던 사실이고, 이러한 인성교육의 역사적 평가가 오늘 우리의 산업사회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와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일은 우리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유학에서의 인성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를 두고 인간관계에서 계속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나가려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따라서 특히 그 활동이 왕성하였던 조선조 중기 서원에서의 인성교육은 각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에 의하여 강조되었던 유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지역 주민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인성교육의 방향을 재정립하는데 바람직한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서원에 배향된 유학자들 가운데 명주군(溟洲郡)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는 율곡이 홀로 배향되어 있고, 그의 유학이 모친 신사임당의 유훈(遺訓)과 함께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전역 주민들의 인성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어 왔다는 사실은 그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 그것은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물질 중심의 성향에서 도덕적 생활을 중요시하는 성향으로 전환시켜 삶의 질을 높은 위치로 끌어올리는데 율곡의 유학이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 유학의 참뜻을 새롭게 정의하여 실제 교육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바람직한 계획의 수립과 함께 그 실행을 위하여 교육계에서 명실상부하게 노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등장하는 중요한 자료는 『강원도 향교서원 사찰지(江原道 鄕校書院寺刹誌)』이다. 이 자료는 1992년 강원도청에서 발행된 것으로 이 글에서는 주로 서원(書院)에 관한 자료를 인용하여 강원지방의 성리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들 자료를 기초로 하여 서원에 배향된 인물을 선정하고, 그 분들의 사상과 업적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자료를 통하여 그 배향된 인물의 사상과 업적을 보완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 소개되고 있는 율곡과 퇴계의 만남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점이 많다. 그 두분의 만남에서 나누는 진지한 대화의 내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주는 교훈으로 재음미되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논의되고 정리되어 갈 이 글의 내용에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은 그 진술된 내용의 중요한 부분을 오늘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하여 나갈 것인가에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적용 방안을 모색하여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실현하여 나갈 수 있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결론 부분에서 그 시안(試案)을 탐색하는 데 깊은 관심이 기울여질 것이다.
Ⅱ. 유학(성리학)의 의미
성리학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의하여 설득력을 높여줌으로써 그 영향을 극대화하려는 데 그 연구의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성리학은 유학을 그 기반으로 하여 발달된 학문이다. 성리학에서 이기(理氣)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전제하고 그 설명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율곡 이이(李珥)가 `이`와 `기`의 오묘한 관계는 보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말한 것은 이를 입증하여 주는 좋은 사례다.이들 설명이 어렵다는 일반적인 지적은 `이`와 `기`의 본질과 그 상호관계에서 나타나는 의미를 길이 인식하고, 그 내용들을 반드시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여야 한다는 데서 찾아지는 것이다. `이`와 `기`의 본질과 바람직한 상호관계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 실제 일상 생활에서 그러한 본질과 의미를 지속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율곡이 `이`와 `기`의 오묘한 관 계를 설명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가 무형(無形)이고 무위(無爲)인데 반하여 `기`는 유형(有形)이고 유위(有爲)라는 의미에서 유추하여 `이`는 원리, 원천, 근원, 이상 등의 의미를 지니고 `기`는 지엽적인 것, 현실 등의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상(理想)의 뜻인 `이`와 현실(現實)의 의 미인 `기`가 서로 무리 없이 잘 소통이 되는 관계, 즉 이상과 현실이 상호 잘 어울려 이상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상태는 곧 서로의 개 방에서 소통과 부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이 서로 단절된 상황, 즉 이상이 현실로 전혀 나타나지 않는 상태는 곧 서로의 폐쇄 에서 부득이한 단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성리학의 참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부합이 지니는 의미를 스스로 내면화 하여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일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한편 화담 서경덕의 성리학은 기(氣)와 관련된 문제를 강조하여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화담의 성리학은 유기론(唯氣論)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율곡에 의하면, 이러한 평가는 화담의 성립ㄹ==리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화담은 `기`의 개 념을 `이`의 개념으로 혼돈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담의 이기론(理氣論)은 `이`와 `기`에 관한 개념상의 문제가 제기될 뿐이지, 유기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하여 `이`의 의미를 떠난 `기`의 내용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기`의 관계에서는 `기` 를 `이`보다 우위에 놓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오히려 `이`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고 있는 일면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와 `기`의 총체적인 해석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부담 없이 소통하고 있다는 이론의 전개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퇴계의 이기론은 화담의 경우와 매우 다르게 전개된다. 퇴계에 의하면 `이`와 `기`는 이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기`의 관계는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견해는 `이`가 존귀한데 반하여 `기`는 천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또한 `이`는 순선(純善)한데 비하여 `기`에는 선(善)과 악(惡)이 같이 내재하여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에 선과 악이 같이 내재하여 있다는 설명에서 의외로 `이`와 `기`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된다. `기`에 내재하고 있다는 선악과 `이`에 순선이 내재하여 있다는 의미와는 동일하지 않지만, `기`의 `선`이 `이`의 순선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이`와 `기`는 서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퇴계는 경(敬)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퇴계에 의하면 경은 이상으로 설명되는 형상(形象)과 현실로 해석되는 형하(形下)를 서로 소통하게 해주는 것으로, 경에 의해서 `이`< 이상(理想)>와 `기`< 현실(現實)>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은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실천덕목이다. 경은 인간관계에서 사심(私心)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겸손한 태도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두를 지칭한다. 이러한 경의 태도는 인간의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순선으로서의 `이`가 인간 모두에게 간직되어 있다고 하는데 근거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인간 존엄성의 상호 존중이라는 인간 행위의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한편 `이`와 `기`를 묘합(妙合)하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율곡 성리학의 특징이면서 장점이다. 화담이 `기`의 성향에 좀 더 비중을 두었고, 퇴계가 `이`의 존귀성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보면, 율곡은 이 양자의 이론을 묘합(妙合)이라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어려운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성리학의 본질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본연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 본연성을 자세히 밝히고 그로 인한 인간관계를 어떻게 유지 하여 나아갈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설명된다. 그런데 이 인간의 본연성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든지 그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고 또한 존귀한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존귀한 인간의 본연성이 누구에게든지 그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 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설명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인간의 다양한 행위는 선악의 가치적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현실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귀한 모습으로 모든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인식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려는 자아의 발견이 바로 성리학(性理學)의 진의(眞意)다.
Ⅲ. 강원지방 유림(儒林)의 의리적 삶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집단을 유림(儒林)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이란 고려 말기 정몽주(鄭夢周), 길재 (吉再), 김숙자(金叔滋)등을 그 조종(祖宗)으로 삼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組)로 이어진 학통을 중심으로 군집한 학자들을 말한다. 이들 사림은 조선 초기 세조(世祖) 이후 전원산림(田園山林)에서 유학(儒學)을 연구하여 오다가 성종(成宗) 때 관계에 진출하여 도학적 유교 정치를 실현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훈구파와 대립하면서 사대사화(四大士禍)로 추방됨에 따라 향리에 돌아가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유학 진흥에 진력하였다. 따라서 사림은 특정한 시기와 정치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헌신한 인물들로, 이들 모두는 성리학의 의리사상에 근거하여 이를 정치 현실에 적용하려고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유림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림을 조선조 전기 강원지방이라는 틀에 알맞게 선정하여 그들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준을 마련 한다는 것은 그 적합성에 논란의 여지가 항상 잠재하여 왔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정의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려는 기준이 1992년 강원도가 발행한 『강원도향교서원사찰지(江原道鄕校書院寺刹誌)』의 서원부분이다. 강원도내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을 조선조 중기 강원 지방의 유림으로 한정하려는 것은 『강원도향교서원사찰지(江原道鄕校書院寺刹誌)』의 서원 부 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서원에 배향한 이들 인물의 사상과 업적이 서원의 교육을 통하여 조선조 중기 강원 지방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 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史料)의 객관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강원 지방 서원의 설립연대, 소재지, 배향인물, 사액연도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원명 書院名 |
설립연대 設立年代 |
소재지 所在地 |
배향인물 配享人物 |
사액연도 賜額年度 |
---|---|---|---|---|
오봉서원 (五峰書院) |
1556(명 종11)1556(明 宗11) | 명주군 성산면 오봉리 溟洲郡 城山面 五峰里 | 공자 주자 송시열孔子 朱子 宋詩烈 | |
송담서원 (松潭書院) |
1624(인 조 2)1624(仁 組 2) | 명주군 구정면 언별리 溟洲郡 邱井面 彦別里 | 이이李珥 | 1660 |
칠봉서원 (七峰書院) |
1612(광해군 4)1612(光海君 4) | 원주군 호저면 산현리原州郡 好楮面 山峴里 | 원천석 원호 정종영 한백겸元天錫 元昊 鄭宗榮 韓百謙 |
1673 |
도천서원 (陶川書院) |
1693(숙 종19)1693(肅 宗19) | 원주군 위치미상原州郡 位置未詳 | 허후許厚 | 1693 |
문암서원 (文岩書院) |
1610(광해군 2)1610(光海君 2) | 춘천시 신북면 용산리春川市 新北面 龍山里 | 이황 조경 이연형李滉 趙絅 李延馨 | 1648 |
도포서원 (道浦書院) |
1650(효 종 1)1650(孝 宗 1) | 춘천시 서면 신매리春川市 西面 新梅里 | 신숭겸 신흠 김경직申崇謙 申欽 金敬直 |
|
동명서원 (東溟書院) |
1628(인 조 6)1628(仁 組 6) |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襄陽郡 襄陽邑 造山里 | 조인벽 조사趙仁壁 趙師 | |
경행서원 (景行書院) |
1639(인 조17)1639(仁 組17) | 동해시 송정동東海市 松亭洞 | 김효원 허목金孝元 許穆 | |
용산서원 (龍山書院) |
1705(숙 종31)1705(肅 宗31) | 동해시 쇄운동東海市 灑雲洞 | 이세필李世必 |
이와 같이 강원 지방의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20명의 인물 가운데 공자와 주자 그리고 신숭겸은 조선시대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이분들의 사상이나 업적은 논외(論外)로 하고, 이이와 이황의 사상과 업적은 편의상 다음의 Ⅳ항 `퇴계와 율곡의 만남과 그 상호존경`에서 함께 설명하기로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들 5명을 제외하고, 모두 15명을 대상으로 조선 전기 전후의 강원지방 유림의 사상과 교육활동을 약기(略記)하려는 것이다.
오봉서원에 공자 주자와 함께 배향된 송시열(1607∼1589)은 성리학자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이다. 그의 성리학은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김장생(金長生)의 예학(禮學)을 전수하여 당시의 당쟁과 양난(兩難)으로 피폐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수기(修己)와 안민(安民), 정기(正己)와 물정(物正)을 강조하면서 문인(文人) 이단하(李端夏), 권상하(權尙夏), 김창 협(金昌協) 등에게 그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정계(政界)에서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칠봉서원(七峰書院)에 배향된 원천석은 고려 말기의 유학자로 당시의 혼란한 정치 현실을 뒤로하고 일생 동안을 치악산(雉岳山) 동남쪽 중턱에 숨어 생활하였다. 원천석은 태종의 옛 스승으로 그가 즉위하였을 때 태종은 이곳 치악산까지 직접 찾아 왔으나,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고려를 배반하였다 하여 산 속 깊이 숨고 만나주지 않았다. 이러한 원천석의 절의(節義)를 사표(師表)로 삼아 인재의 양성과 사회교화의 목적으로 지방 유림들이 칠봉서원을 건립하고 원천석(元天錫)을 배양하게 된 것이다. 칠봉서원에 같이 배향된 원호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세조 3년(1457)에 단종(端宗)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로 들어가 토굴을 파고 3년 동안 단종의 복(服)을 입었다. 세조가 원호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당시 관직에 있는 친구들이 찾아 와도 만나주지 않은 채 단종에 대한 절의를 일생동안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서원에 배향된 정종영(1513∼1589)은 강원도 를 비롯한 4개 도(道)의 관찰사(觀察使),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석찬성(石贊成)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후세에 청백리(淸白吏)로 평가 를 받은 인물이다. 또한 이 서원에 배향된 한백겸(1552∼1615)은 『예기(禮記)』,『주역(周易)』에 밝았으며, 역사, 지리의 연구에 고증 학적 방법을 적용한 실학의 선구자였다.
허후(1588∼1661)는 사액서원인 도천서원에 홀로 배향된 학자로 지평현감(砥平縣監), 공조좌랑(工曹左郞), 은산현감(恩山縣監) 등의 관직 생활을 한 인물이다. 그는 종제(從弟)인 허목(許穆)과 함께 예학사상으로 유명한 정술(鄭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후는 예법, 병 법, 천법(天法), 지리와 음양의 도수에 밝았으며, 외직(外職)을 거치면서 지방의 목민관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사액서원인 문암서원에 이황, 조경과 함께 배향된 이연형(1549∼1609)은 성리학자로 임진왜란 때 황해도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관찰사, 대사성, 대사헌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평소에 이황을 흠모하였고, 말년에는 관직을 떠나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다. 조경(1586∼1669)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司諫)의 관직에 있으면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던 성리학자다. 목민관과 대제학 등 관 직을 두루 거쳤고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도포서원인 문암서원에 신숭겸, 김경직 등과 함께 배향된 신흠(1566∼1628)은 신숭겸의 19대 손으로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김경직(1567∼1634)은 문행이 놓은 인물로 인목대비에 대한 페모사건 등의 난정(亂政)등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춘천 우두(牛頭)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신흠과 함께 우두정(牛頭亭)을 중심을 하는 춘천 지역의 자연을 벗삼아 도의를 강론하였다.
동명서원에 배향된 조인벽은 고려 말기의 무신(武臣)으로 이성계(李成桂)와는 처남매부 사이였으며, 이성계가 평소에 친해왔던 정몽주 (鄭夢周)를 제거하자 벼슬을 버리고 일생동안 학문과 후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조사는 조인벽의 넷째 아들로 어려서 정몽주에게 수학(修學)한 이후 부친을 따라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조사는 외삼촌(外三寸)인 이태조(李太組)가 내린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정몽주가 생명 이상으로 소중하게 여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정신(義理精神)을 흠모하면서 일생을 살았다.
경행서원에 배향된 김효원(1532∼1590)은 조식과 이황에게 수학(修學)한 인물로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있을 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후학(後學)에세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경행서원(景行書院)을 건립하여 배향된 것이다. 그리고 이 서원에 김효원과 같이 배향된 허목(1595∼1682)은 50여세가 될 때까지 경서(經書),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예학(禮學) 등의 학문에 전념한 인물로 60세에 접어들면서 관직에 나아가 많은 치적을 남겼다. 특히 삼척 부사로 재임 중에 향약(鄕約)을 만들어 주민을 교화하였으며, 마을에 사당을 건립하여 선현 (先賢)을 존숭(尊崇)하였고, 효자와 열녀를 찾아 그들을 존숭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용산서원에서는 이세필(1642∼1718)이 홀로 배향되어 있다. 이세필은 송시열과 박세채에게 수학한 인물로 삼척 부사로 부임한 후 입교홍학 (入校興學)하여 학구(學究)의 열기를 주변에 펼치고 교육을 진흥시키는 등 학풍과 치적에 공로가 많았다. 그는 숙종 31년(1705) 봄에 인재 양성을 위하여 자신의 녹봉으로 손수 용산서원을 건립하였다.
Ⅳ. 퇴계와 율곡의 만남과 그 상호 존경
율곡 이이는 이(理)와 기(氣)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이어야 하고, 서로 섞여져 있지 않은것이기 때문에 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이`의 본체와 `기`의 현상 이라는 이원(二元)의 묘합(妙合)의 체인에 의하여 일원(一元)으로 통일하려는 이론을 펼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일원으로 통일하려는 이론을 전재하면서도 `이`의 본체와 `기`의 현상은 각각 그 특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특성의 보존이라는 입장에서는 일원이 다시 이원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이기론(理氣論)의 전개는 그의 창견이라고 평가되는 이통기 국(理通氣局), 즉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한다는 내용에서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율곡은 `이`의 보편성과 `기`의 특수성을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그의 독창적 이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나 모든 사물의 특성이 각각 다른 것은 `기`의 국한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특성에는 `이`의 본체가 각 사물들에 내재하여 있기 때문에 `이`의 본체가 그렇게 내재하여 있다는 측면, 즉 이통(理通)의 의미에 있어서는 인간이나 사물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나 사물이 이통(理通)에 의해서 동일하다는 것은 바로 `이`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전개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율곡의 이통기국론은 `기`를 중시하는 학설이나, `이`를 중요시하여 강조하는 이기론을 지양함으로써, 보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창견 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율곡의 이기론은 `이`와 `기`각 상호 의존과 보완 관계에 있다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으며, 이 함의는 개방성이 서로의 협력에 의해서 유지 발전되는 성격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율곡 이이(1536∼1584)는 송담서원(강원도 명주군 구정면)에 홀로 배향되어 있고, 퇴계 이황은 문암서원에 이연형, 조경 등과 함께 배향 되어 있다. 이들 두 분은 한국 성리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강원지방의 서원에 배향되어 지역 주민의 인성교육에 많은 도움을 주어 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율곡은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모친과 외조모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고 6년의 성장기를 보내는 동안 원만한 인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인격의 바탕에 율곡 자신의 끈질긴 노력이 함께 함으로써 그가 끼친 영향이 국가에 지대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62년 이후 강릉시 주최로 매년 가을에 대현(大賢) 이율곡 선생제를 성대하게 봉행하고 있다.
한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으로 8년 동안이나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과 진지한 논쟁을 펼쳐 나아감으로써 한국 성리학 발전에 큰 공 적을 쌓았던 퇴계가 춘천의 문암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은 춘천이 퇴계의 외관(外貫)이라는 명분을 춘천지방의 유생들이 내세워 가능 하였다. 춘천이 퇴계의 외관인 점과 함께 퇴계는 공무(公務)로 춘천에 출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퇴계집』시(詩) 부분의 「과청평 산유감병서(過淸平山有感幷序)」라는 내용은 공무로 퇴계 자신이 청평사(淸平寺) 근방을 지나면서 쓴 것으로 춘천과 인연이 있었던 대표 적 사례가 된다.
퇴계의 인품이나 성리학이 강원 지방과 이처럼 관련이 있었다는 사연은 퇴계가 율곡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에 의하여 그 정도를 더욱 짙게 하여 주고 있다. 강원 지방이 율곡 성리학 형성의 배경이면서 동시에 그가 끼친 영향을 어느 지역에서 보다 높이 기리고 있는 지역 이라는 사실은 경북 지방에서 퇴계가 그러하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이 두 인물의 진지한 만남은 강원과 경북 두 지방의 바 람직한 정신문화 형성과 발전에 상호 영향을 주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약 1년 동안 금강산에서 불서(佛書)를 접하고 하산한 율곡은 그 후 3년이 지난 23세(1558)되는 봄철에 도산서원(陶山書院)에 가서 35년 연상인 퇴계를 만나 이틀 동안 대화를 나눈 일이 있다. 이틀 후 율곡이 돌아간 다음 퇴계는 그의 제자 조목(趙穆)에게 ‘후생가외(後生可 畏)'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율곡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했다. 그 후 퇴계가 별세한 2년이 지나서(1572) 우계 성혼(牛溪成渾)에게 보내 는 율곡의 서신(書信)에 의하면 도산서원에서 퇴계를 만나‘이발기수(理發氣隨)'라는 퇴계의 학설에 대해서 질문하려 했지만, 자신의 학 문이 그 당시로는 얕다고 생각되어 감히 그렇게 못하였던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율곡 자신이 퇴계의 인품과 학문에 대하여 무엇인가 모자라고 있다는 자신의 발견과 함께 퇴계를 마음 속으로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진지한 퇴계와 율곡의 첫 만남은 35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통하여 인품과 학문을 서로 존경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퇴계와 율곡의 각각 다른 학설을 분수령으로 하여, 조선 중기 이후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형성되어 서로 비판의 시각 과 발전의 면모가 복잡하게 교차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학설의 지엽적인 의견차이에 구애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인 인간의 고귀한 품격과 학구적인 진지한 자세에서 진면목을 찾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고심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새로 운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Ⅴ.맺는말
조선조 중기 서원을 중심으로 한 강원지방의 성리학 연구 현황과 의리의 실쳔을 중심으로 한 교육적 성과는 율곡을 정점으로 하여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처럼 시대와 지역의 제한 속에서 살펴본 성리학의 내용과 의리사상을 중심으로 강조되는 교육의 의미가 오늘 우리 사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에 관한 방향의 설정이다.이러한 방향의 설정을 위하여 우선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은 성리학에서 인성교육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를 내면화하는 일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리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성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인하는 길이고, 구체적인 의미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인식하고 실제 인간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물질 지향을 위주로 살아가는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수하게 나타나는 인간소외를 치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조 사회의 경우보다도 더욱 절실한 것이다.
특히 현대 산업사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우리의 전통사상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절실히 요망되는 것이다. 성리학을 비롯한 우리 전통사상의 기능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나가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이들 사상은 인간의 의미를 근본적 으로 탐색하는 데 항상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을 깊이 지님으로써 우리의 전통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신념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이처럼 중요한 신념을 심어 주기 위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사상을 충실히 이해하도 록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지도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이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주의하여 실행해야 할 것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직자와 그 행정부서,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대중매체의 제작 자들, 각계각층의 지도자들, 그리고 가정교육에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모들 모두가 합심하여 우리의 전통사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 정리하고, 이에 적합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실제 교육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이다.
사실 우리 나라의 경제발전은 괄목할 정도의 양적 발전을 이루어 내는 데 성공은 하였지만, 이러한 경제 중시의 영향에 의해서 발생한 인간경시 풍조가 팽배하여 짐으로써 실제 삶의 현장은 많은 어려운 문제와 각종 범죄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전통사상으로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실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 것인가를 쉽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 용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인성교육에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대는 우리 사회의 질적인 삶을 위하여 경제성장을 건전하게 유도하여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경제 성장의 양적인 팽창에 의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관심은 점점 멀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물신주의(物神主義)에 치우친 인간관계의 기준이 설정됨으로써 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혼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경제성장이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존경하면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양적인 경제성장에 의한 자원의 고갈을 최대한 연장 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덕망을 근본으로 여기고 삶의 수단인 경제적 조건을 지엽적인 것으로 여김으로써 경제성장의 질적인 의미를 충족시켜 주게 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여야 할 건전한 삶의 지표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 성리학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현대 사회에 적용하려는 작업은 어떤 사회에서나를 막론하고 자기 이익의 충족을 중요 시하여 왔다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의리의 실천을 중심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그리고 조선조 중기 강원 지방의 성리학도 바로 이러한 현실문제를 전제하고 그 해소방안에 착안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율곡 성리학의 의미도 항상 그와 같은 자기 이익을 충족시키려는 성향에서 의리사상의 실현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의도와 깊이 연계되어 입론함으로써 조선조 실학사상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공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듭 강조하여 온 진술이지만, 성리학에서 의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인간 존엄성의 인식을 근거로 하여 모든 인간관계가 서로를 존경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미로 정의된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지속적으로 서로를 존경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인식과 실행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리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의리의 실천을 사회 구성원 사이에 명실공 히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주변의 타인들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은 한계가 있 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정신적 능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가능한 일이다.
결국 성리학에서 의리의 실천을 논의하는 주안점은 정신적 능력에 관한 설득력 있는 설명에 의해서 그 진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시도된 정신적 능력의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이에 따라 인간관계에서는 나 스스로가 주변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강인한 의지와 그 실천을 위한 노력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실제 인간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모습은 근면함과 검소함, 그리고 겸손함이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인간 존엄성의 인식을 근거로 하여 설명되는 의리사상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 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 삶의 모습에 의해서 서로의 이해와 협조가 가능하고, 나아가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게 됨으로써 사회 의 안정과 국가의 발전을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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